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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어사 박문수 활동과 업적, 영조와의 관계, 누명 사건

by 승인아커몬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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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신뢰관계가 깊었던 어사 박문수
영조와 신뢰관계가 깊었던 어사 박문수

 

어사 박문수의 활동과 업적

박문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어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문수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박문수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노력과 열정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박문수는 지방을 감찰하는 직책인 어사를 하면서 백성의 편에 서서 민심을 두루 살피고 그들의 고충을 조정 대신들과 왕에게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 배경은 많은 부정부패와 사회적 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박문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뚝심 있게 밀어붙이던 박문수는 철저한 조사와 공정한 판단으로 여러 사건을 해결했으며, 특히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여 그들의 편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삼척에서의 흉년 구호 활동과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 사례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박문수가 백성들 사이에서 '청렴한 어사'로 존경받게 만든 중요한 이유입니다. 박문수는 그가 생전에 보여준 청렴성과 공정성 덕분에 많은 설화와 전설 속에서 '어사 박문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민간에서 널리 전해졌으며,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품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비와 유적지가 존재합니다.

 

영조와의 관계

박문수와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의 첫 만남은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한 뒤 1년이 흐른 1724년에 이뤄집니다. 당시 34살의 박문수와 31살의 영조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제 시강원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세제는 후계자로 책봉된 왕의 동생을 뜻합니다. 영조 이전의 임금은 영조의 형이었던 경종이었습니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은 즉위한 뒤에도 자식을 보지 못해 동생 영조는 후계자로 확정했습니다. 영조가 세제로서 제왕 준비에 한창이던 1724년, 박문수는 영조에게 왕의 덕목과 고서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임명되어 시강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영조와 박문수는 사제에서 군신으로, 관계의 이름을 뛰어넘는 두터운 신뢰를 쌓아가는 한편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힘썼습니다. 즉 이들의 관계는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동반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개혁적인 인물을 중용하였습니다. 박문수는 이러한 영조의 의지에 부응하여,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척결하기 위한 어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박문수의 능력과 성실함은 영조의 신임을 받기에 충분했고, 이는 두 사람의 강한 협력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박문수는 영조의 개혁 정책을 실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영조는 탕평 정책을 통해 당파 싸움을 줄이고, 사회 전반의 안정을 꾀하였는데, 박문수는 이러한 영조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박문수와 영조의 관계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박문수와 영조의 관계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명을 쓰게 된 사건

어사 박문수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청렴한 관리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생애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난을 겪었던 사건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청렴성과 공정성을 더욱 부각하는 동시에,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적 복잡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1743년, 영조 앞으로 박문수가 탐욕스럽게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고발의 내용을 담은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박문수는 1739년 북쪽 지역인 함경도 지역 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관찰사 부임 시절에 불법 행위를 저질렀으니 탄핵해야 마땅하다는 상소였습니다. 박문수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고한 인물은 홍계희, 병조 판서 및 함경도 감진어사를 역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홍계희의 상소로 박문수는 옥에 갇혀 조사받게 되었습니다. 박문수를 누구보다 신뢰하던 영조였지만 혐의가 혐의인 만큼 조사가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렇게 박문수는 모함받아 약 한 달 반 동안 옥에 갇힙니다. 그동안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관찰사로 부임했던 시절의 행적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조사 결과, 박문수에게는 그 어떤 혐의도 없었습니다. 박문수는 공금을 단 한 푼도 사적으로 쓴 적이 없는 사실이 드러나며 박문수의 청렴함을 다시 한번 입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조는 박문수를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명령하고 거짓 상소를 올린 어사 홍계희를 파직시켰습니다. 박문수가 누명을 쓰게 된 사건은 그가 단순히 청렴한 관리로서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정치적 음모와 갈등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신념을 지킨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박문수의 결백이 밝혀진 후, 그는 더욱더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이전보다 더욱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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