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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술국치 배경과 정의,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이완용의 매국행위

by 승인아커몬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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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체결
경술국치 체결

 

경술국치 배경과 정의

경술국치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이라고도 불리며,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 국민들은 나라를 잃었고, 우리 땅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경술국치가 체결되기까지 여러 가지 복잡한 배경과 경위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며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덕수궁 중명전에서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일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일본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모든 것을 지배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정미7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의 손아귀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의 병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경술국치를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2개월이 지난 1905년 11월 9일, 일왕의 특사가 경성에 도착했습니다. 특사는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 위문을 명목으로 경성에 왔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차지한다고 국제적으로 공표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11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을사늑약을 체결하라고 했지만 고종은 결정을 미루며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이 모여 있던 덕수궁 중명전으로 헌병들을 이끌고 쳐들어갔습니다. 회의장에 8명의 대신들을 가두고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8명 중 5명이 찬성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전회의에서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기로 했는데, 막상 총칼을 찬 헌병대 앞에서는 찬성표를 던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에게 외부대신 직인을 가져오라고 시킨 뒤 조약문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날 을사늑약에 찬성하고 사인한 5명이 대신이 바로 을사오적입니다.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이 5명의 대신입니다. 8명의 대신 중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사람은 단 1명, 지금의 부총리 격인 참정대신 한규설뿐이었습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가 넘었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의 찬성을 빌미로 조약 체결을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완용의 매국 행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 5명 중 대표 인물인 이완용은 매국 행위를 두 번이나 더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총 3개의 매국 타이틀을 가집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 정미7조약을 체결한 정미칠적, 그리고 나라를 완전히 팔아넘긴 경술국적입니다. 경술국치 이후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더욱 다양하고 집요해졌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배우도록 했고,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을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일본은 매국인사들의 공로에 따라 작위와 돈을 내렸습니다. 나라를 판 대가로 이완용이 받은 것은 백작 작위와 15만 원이었습니다. 현대의 가치로 따지면 약 30억에 해당하는 거금입니다. 1913년에 지은 이완용의 집은 무려 3,700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고, 1920년 초에 그가 가진 현금은 약 300만 원으로 지금의 600억에 이르는 금액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나라와 민족을 판 대가로 돈을 쓸어 모으며 죽을 때까지 반역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926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완용이 죽은 뒤 신문 사설에는 "팔아서 안 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완용은 친일파의 명대사로 여전히 비난받고 있습니다. 파렴치한 매국노, 나라를 팔아넘긴 대역죄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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