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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복 역사적 배경과 주요 사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용했던 광복 당일

by 승인아커몬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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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날 8월 15일
광복의 날 8월 15일

 

광복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사건

나라의 경사로운 날을 축하하기 위해 지정된 날을 국경일이라 합니다. 이날은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라 국기도 게양합니다. 한국의 국경일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입니다. 그중에서도 광복절은 전국적으로 경축 행사가 벌어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축일입니다. 광복은 말 그대로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적 의미로는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였고, 이 기간에 한국인들은 많은 고통과 억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지속해서 이루어졌고, 국제 사회의 변화와 함께 광복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광복의 과정에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한국의 독립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언급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광복은 단순한 식민 지배의 종식을 넘어 한국의 자주성과 주권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한국 민족에게 큰 자긍심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광복 후 한국은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현대 국가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복 후 조선을 식민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는 자신의 나라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찾아갔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만이 조선 사회의 분노를 통제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운형은 일본과 지속해서 소통하면서도 결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지 않은 아주 드문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신망받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안전을 챙기려 한 조선총독부와 그들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인수해 조선인이 주체가 되는 독립 정부 수립에 나서려 한 여운형이 서로 원하는 바를 주고받았습니다. 여운형은 일본인의 안전을 대가로 다섯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치범과 경제범 중 대부분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수감된 이들의 석방을 첫 번째로 요구했습니다. 둘째, 3개월간 식량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한반도의 식량과 생필품 보급은 조선총독부에서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조선총독부가 손을 놓아버리면 당장 조선인들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활동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넷째, 청년과 학생을 조직 훈련하는 데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다섯째,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요구를 받아들인 조선총독부와의 회담을 마친 여운형은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광복 당일 조용했던 이유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은 아주 조용하게 지나갔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그날은 조용했고 그다음 날인 8월 16일에 만세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광복 당일 조용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아침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에서 떨어진 핵폭탄은 약 4천 도의 열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화염이 도시를 휩쓸었고, 히로시마는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연합국의 계속된 항복 요구를 무시한 채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서 침략 전쟁을 이어갔고 이에 연합국인 미국이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핵폭탄을 떨어트린 것입니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고, 일제의 식민 지배는 끝이 났습니다. 8월 15일 낮 12시,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과 패전을 암시한 말을 방송했지만, 일왕의 방송은 일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왕실 용어로 이루어져 있었고, 녹음 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축배를 들어도 모자란 해방의 날에 조선의 풍경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즉, 방송의 내용을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로는, 방송의 내용을 이해한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제의 경찰과 군인이 조선에 그대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됐다는 사실을 눈치챈 몇몇 사람들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해방의 순간이 찾아왔지만, 대부분의 조선인은 해방이 온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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