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발생배경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병자년에 오랑캐가 침입한 난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오랑캐는 북방 민족인 여진족을 가리킵니다. 여진족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조선은 금방 수세에 몰렸고,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약 한 달 반 동안 대항하지만 버티지 못했고 결국 삼전도로 나와 굴욕적인 패배 의식을 치렀습니다. 여진족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친명배금이란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말입니다. 후금은 여진족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기 이전에 쓰던 국호입니다. 친명배금은 그 시절 조선을 지배한 가치관이었고, 후금이 청나라가 된 뒤에도 이러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건국 당시부터 '사대교린'의 외교를 지향했는데,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것으로, 이 대상은 명나라였습니다. 명을 이른바 '아버지의 나라'로 여겨 임금이 즉위하거나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마저 승인받을 정도였습니다. '교린'이라 함은 여진족이나 일본에 물품이나 관직을 주고 침략을 막는 것을 뜻하는데, 와중에도 여진족은 오랑캐라며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린의 대상이었던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완벽하게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조선은 청나라를 무시했습니다. 청나라는 그런 조선을 굴복시키고 신하로 만들겠다며 조선에 쳐들어온 것입니다.
삼전도의 굴욕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패배했습니다. 조선 왕인 인조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청나라에 항복했고, 처절하게 잘못을 빌어야 했습니다. 조선은 청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모래벌판 위에 황금색 천을 지붕으로 삼은 높은 단이 세워졌습니다. 단 아래에는 남색 옷을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인조가 서 있었습니다. 인조는 모랫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땅에 대고 큰절했습니다. 삼배구고두례에 따라 절을 했습니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무릎을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청나라 예법입니다.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을 겪었던 이날의 일을 가리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높게 쌓은 단 꼭대기에 앉아있던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절을 했던 것입니다. 인조는 곤룡포까지 벗어야 했습니다. 조선 왕이 입는 곤룡포는 붉은색이지만, 인조는 남색 옷을 입었습니다. 남색은 신하를 의미하는 색깔이었습니다. 즉, 조선이 청나라를 섬기는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는 뜻이었던 셈입니다. 청나라는 이 일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던 장소인 삼전도에 삼전도비를 세웠습니다. 과거에 큰 홍수로 물길이 바뀌면서 그 나루터 자리는 사라졌고, 현재는 그곳과 가까운 서울 석촌호수 옆에 삼전도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인조와 소현세자에게 조선이 지켜야 할 내용을 칙서에 적어 보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에게 가장 먼저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음으로, 청나라가 요청하면 무조건 군대를 파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요구는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왕자들, 대신들의 아들까지 인질로 청에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소현세자는 중국에 인질로 끌려간 조선의 유일무이한 세자가 되었습니다. 소현세자 일행이 향한 곳은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이었습니다. 심양으로 향하는 고된 여정 끝에 4월 10일 청나라 심양에 도착했습니다. 청나라는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 곳을 지어주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심양관'이었습니다. 심양관은 황궁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감시를 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심양관의 또 다른 문제는 지나치게 협소했다는 점입니다. 이곳의 주거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하여 심양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병에 걸리기 일쑤였습니다. 소현세자는 황제의 사냥, 활쏘기, 공차기, 낚시, 씨름 등의 놀이는 물론, 황실의 각종 연회, 결혼식, 생일, 제사, 장례 등 무슨 일이든 불러대는 황제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게다가 매달 5일과 15일, 20일에는 황제에게 꼭 문안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막한 생활 속에서도 소현세자는 세자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이어갔고, 날짜에 맞춰 문안 인사도 했습니다. 아버지인 인조를 직접 만날 수 없음에도 보름에 한 번씩 조선 궁궐 쪽으로 절을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와중에도 아버지와 나라를 그리는 마음은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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