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1차 침입 배경
12~13세기에 몽골은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중동, 일부 동유럽 국가까지 정복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몽골을 초강대국으로 이끈 지배자는 칭기즈칸입니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기마부대를 이끌며 수많은 나라를 정벌했습니다. 대륙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몽골이 1231년 군사를 이끌고 돌연 고려 땅에 쳐들어왔습니다. 바로 의문의 살인 사건 때문입니다. 1225년 1월의 어느 날, 압록강 강가에서 한 남자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남자는 몽골의 사신이었습니다. 당시 고려와 몽골은 국교를 맺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몽골은 해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공물로 받아 갔습니다. 주검이 되어 돌아온 남자도 역시 고려의 공물을 받아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그만 시체로 발견되고 만 것입니다. 몽골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사신을 죽였다며 극도로 분노했고, 몽골에 쳐들어오려고 했지만 서방 원정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227년 칭기즈칸이 원정 중 사망을 하고 맙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계승자로 셋째 아들을 지명해 두었는데, 그는 쿠릴타이라는 몽골의 정책 결정 회의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어야만 제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려 원정은 1231년 8월에 이뤄졌습니다. 몽골은 3만의 군사를 끌고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로써 고려와 몽골이 6차례에 걸쳐 치른 전쟁인 여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귀주성 전투
몽골군은 선발대, 주력부대, 내륙공격형 부대로 나뉘어 동시다발적으로 고려 땅을 휘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3개의 부대로 나누어 고려를 전략적으로 침공한 덕분에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런데 몽골군의 부대가 고려의 한 성에 묶이게 되면서 그들의 기세에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성은 지금의 평안북도에 있는 귀주성입니다. 귀주성은 북방 지역의 대표적인 군사 방어지로, 몽골군이 고려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꼭 통과해야만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1231년 9월 초, 귀주성에 도착한 몽골군은 다양한 전술로 공격을 퍼붓습니다. 하지만, 귀주성을 포함해 고려 서북면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박서 장군과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거세게 반격했습니다. 귀주성이 뚫리면 몽골이 고려 전체를 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물러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투는 무려 4개월이나 계속됐습니다. 전투 와중에 갑자기 귀주성 남쪽 문을 둘러싼 몽골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장군 김경손이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 목숨을 건 기습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성안에 있을 줄 알았던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당황한 몽골군은 이전과 달리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귀주성 함락을 포기한 채 돌아갔습니다.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귀주성 사람들이 결국 전투에서 이긴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승리였습니다.
고려의 항복
귀주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적들도 전쟁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몽골군과 싸웠습니다. 무신정권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고 과도하게 세금을 매기면서 민란이 많이 발생했는데, 이처럼 지배자의 수탈에 들고 일어난 농민 저항군을 초적이라고 했습니다. 초적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음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려 정부는 몽골에 항복하고 맙니다. 귀주성이 4개월 동안 중앙군의 도움 없이 힘겹게 성을 지키는 공안, 개경이 함락당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려 중앙군은 개경을 지키려 몽골군과 맞섰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습니다. 개경을 함락당한 고려는 항복을 준비했고 고려와 몽골의 화친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화친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이 없이 가까이 지낸다는 의미지만 실제로는 고려가 몽골을 황제로 받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분할 만큼 손해 보는 협상이었지만 몽골은 거절했습니다. 이 당시 귀주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화친 협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박서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이 장군 박서를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몽골의 충격적인 요구에 고민하던 고려 정부는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박서를 관직에서 해임했습니다. 영웅 박서에게 남겨진 것은 포상은커녕 관직을 빼앗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1232년 음력 1월 11일, 자신들의 뜻을 이룬 몽골군이 고려에서 철수하며 몽골의 첫 번째 침입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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